
| 성남=한스경제 곽호준 기자 |"앞으로 자율주행은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확보하고, 얼마나 빠르게 학습하며, 그 결과를 실제 제품과 서비스에 반영할 수 있는지가 경쟁력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지난 11일 박민우 현대차·기아 AVP(첨단차플랫폼) 본부장 사장 겸 포티투닷 대표가 경기 성남시 포티투닷 사옥에서 '자율주행 미디어 데이'를 열고 현대차그룹의 자율주행 로드맵을 발표하며 이같이 말했다. 현대차그룹이 자율주행 경쟁의 기준을 기능에서 '학습 속도'로 바꾸겠다는 구상이다. 이날 행사에서는 서울 강남과 잠실, 판교 등 혼잡한 도심에서 자체 자율주행 인공지능(AI) '아트리아 AI'가 탑재된 '소프트웨어 정의 차(SDV) 테스트베드'가 주행하는 영상도 처음 공개됐다.
▲ 박민우 사장 "완성차와 AI 경쟁은 완전히 다른 게임"
박 사장은 이날 자동차 산업이 AI 산업으로 재편되는 과정에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동차는 엔진의 힘이나 연비, 제조 품질이 경쟁력의 핵심 기준이었다"며 "앞으로는 차량이 주변을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판단하며 안전하게 움직이느냐가 상품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존 방식만으로 향후 AI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박 사장은 "좋은 자동차를 만드는 것과 훌륭한 AI를 만드는 것은 완전히 서로 다른 역량"이라며 "한 번의 좋은 개발 결과보다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개선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춘 기업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경쟁력을 만들어간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현대차그룹은 '데이터 플라이휠(Data Flywheel)'을 내세웠다. 이는 차량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AI가 이를 학습한 뒤 검증·배포하며 다시 실제 도로에서 데이터를 확보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구조다. 박 사장은 "자율주행 경쟁의 본질은 결국 학습 속도의 경쟁"이라며 "데이터와 AI, 검증이 반복되는 선순환 구조를 기반으로 고객이 신뢰할 수 있는 자율주행 기술을 빠르게 개발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다만 속도를 이유로 완성도를 희생하지 않겠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그는 "시장에서 빨리 내놓는 것만을 목표로 기술의 완성도나 품질을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며 "빠르게 학습하고 개선하면서도 고객이 신뢰할 수 있는 안전과 완성도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 엔비디아로 속도 확보…핵심 기술은 자체 개발
현대차그룹이 내놓은 해법은 외부 협업과 기술 내재화를 병행하는 이른바 '투 트랙(Two-Track)' 전략이다. 우선 엔비디아의 차량용 AI 컴퓨팅 플랫폼과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오는 2028년 상반기 레벨2+(L2+)가 탑재된 양산차를 선보인다. 같은 해 하반기에는 고속도로를 넘어 도심까지 주행 영역을 확대한 L2++ 차량을 내놓는다. 이후 2029년 하반기부터 자체 개발한 아트리아 AI 기반 L2++를 적용해 완성도를 높일 계획이다.
아트리아 AI 양산 시점을 2029년으로 잡은 것도 전략적 선택이다. 박 사장은 "총력을 다하면 더 빨리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면서도 "지금 서둘러 양산하면 우리가 가야 할 '노스 스타(North Star·궁극 목표)'보다 거리가 먼 어정쩡한 L2++를 양산하게 될 수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이어 "엔비디아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노스 스타인 아트리아 AI에 리소스를 집중하자는 선택과 집중의 결과가 2029년 하반기"라고 덧붙였다.

구체적인 실행 전략도 공개했다. 권정현 현대차·기아 자율주행개발센터장 부사장은 "투 트랙 전략의 핵심은 하나는 외부의 검증된 기술을 활용해 시장 진입 속도를 높이는 동시에 직접 핵심 기술을 확보해 장기적인 경쟁력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권 부사장은 "내년까지 주행·주차·능동안전 등 다양한 기능을 제품 차원에서 완성도 높게 구현하고 2028년은 수많은 '엣지 케이스(예외 상황)' 데이터를 모아 정말 안전한 수준의 제품을 만드는 기간"이라며 "2029년은 국내뿐 아니라 북미·유럽 등에서 안전 인증 획득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 많은 데이터보다 '가치' 있는 데이터가 중요
현대차그룹이 가장 강조한 경쟁력은 데이터다. 이를 위해 그룹은 현대차·기아와 포티투닷, 모셔널 등을 잇는 '데이터 유니온(Data Union)'을 구축한다. 그룹 내 서로 다른 조직에서 생성되는 주행 데이터를 하나의 학습 체계로 연결하고 센서·컴퓨팅 환경도 단계적으로 표준화한다는 계획이다.
정성균 포티투닷 아트리아 그룹 GL은 "많은 데이터를 수집한다고 해서 모든 데이터가 똑같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며 "AI가 이미 충분히 학습한 평범한 상황보다 모델이 어려워하는 엣지 케이스를 얼마나 잘 찾아내느냐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박 사장도 데이터의 '양'보다 '질'을 강조했다. 그는 "같은 100만개의 데이터 샘플이라도 중요한 단 하나의 샘플이 전체 성능을 끌어올릴 수 있다"며 "차량이 어떤 상황에 약한지 타깃해 수집하는 '타깃팅 데이터 컬렉션'이 격차를 줄이는 데 중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포티투닷은 데이터 수집 전용 차량 40여 대를 주야간 운영하며 도로공사와 악천후, 급격한 차로 변경, 이면 도로 주정차 차량 등 다양한 상황을 수집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이를 향후 양산차까지 확대해 데이터 수집 규모를 키운다는 구상이다. 현대차·기아가 세계 190여 개 국가·지역에서 연간 700만대 이상의 차량을 판매하는 만큼 대규모 실도로 데이터를 확보해 AI 학습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판단이다.
정 GL은 "현대차그룹은 글로벌 톱티어 제조 역량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데이터 스케일을 확장하는 데 유리한 포지션"이라며 "자율주행 시스템의 본격적인 양산이 시작되면 5년 이내에 경쟁사들이 누적한 데이터의 양을 추월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 E2E 넘어 VLA…차량이 판단 이유까지 설명
포티투닷은 기존 E2E(End-to-End) 방식과 함께 차세대 'VLA(Vision-Language-Action)' 모델도 병행 개발한다. 이희석 포티투닷 트리온 그룹 GL은 "VLA는 시각 인지와 언어적 사고, 행동 생성이 하나로 결합된 모델"이라며 "E2E가 시각 정보를 바탕으로 주행 행동을 결정하는 'Vision-Action' 모델이라면 VLA는 여기에 언어(Language)가 추가된 형태"라고 설명했다.

VLA는 언어를 통해 희귀 상황을 학습하고 차량의 판단 근거까지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GL은 "사용자가 '저기 빨간 차 뒤에 정차해줘'라고 명령할 수도 있고 반대로 모델이 왜 지금 차선을 변경하고 있는지를 사용자에게 설명할 수도 있다"며 "차량이 판단 근거를 설명할 수 있다면 사용자가 시스템을 신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포티투닷은 올해 초 VLA 개발을 시작해 현재 시뮬레이션 검증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말에는 실차 테스트까지 포함한 개발 체계를 구축할 계획이다. 이 GL은 "궁극적으로 마치 베테랑 운전기사가 태워주는 듯한 고객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차세대 자율주행 기술이 목표"라며 "E2E 모델과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데이터를 공유하며 VLA 개발을 병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현장에서는 이를 위한 실제 개발 차량도 공개됐다. 포티투닷은 아이오닉6 기반 SDV 테스트카 약 20대와 아이오닉5 기반 데이터 수집 차량 약 40대를 운영하고 있다. 수집 차량에서 확보한 실도로 데이터는 AI 학습에 투입된다. 개선된 소프트웨어는 다시 테스트카에 적용돼 워크샵과 실제 도로에서 검증된다.
박 사장은 "자율주행은 한 번의 발표나 시연으로 완성되는 기술이 아니다"라며 "더 많이 학습하고 더 빠르게 개선하면서도 고객이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의 안전과 완성도를 함께 확보하겠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