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화성=한스경제 곽호준 기자 |로봇 두 대가 서로 호흡을 맞추듯 차체를 들어 올려 다음 공정으로 옮긴다. 뒤이어 생산라인에는 생김새가 다른 PV5가 차례로 들어서지만 로봇은 차량 사양을 스스로 구분해 각기 다른 작업을 수행한다. 하나의 차를 빠르게 찍어내는 대신 수많은 종류의 차를 한 라인에서 만든다. 기아가 그리는 목적기반모빌리티(PBV) 생산 방식이다.
8일 경기 화성시 기아 오토랜드 화성에 위치한 'EVOPlant East(이보 플랜트 이스트)'를 찾았다. 이곳은 지난 1997년 이후 기아가 국내에 처음 세운 신공장이자 PBV 전용 생산시설이다. 2023년 4월 기존 공장을 철거한 뒤 2024년 11월 완공했으며 현재 기아의 첫 PBV 'PV5'를 연간 5만대 규모로 생산하고 있다.
EVO는 'Evolution(진화)'의 의미를 담았다. 기아는 이곳에 △다차종 유연생산 △공정 자동화 △데이터 기반 품질관리 등 세 가지 생산 혁신을 적용했다. PV5 패신저(승객용)와 카고(화물용)는 물론 WAV(휠체어 접근 차량), 샤시캡 등 다양한 파생 모델을 하나의 생산 체계에서 소화하기 위해서다.

PV5는 무려 180개 이상의 사양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양이 한 생산라인에 연이어 투입돼도 설비가 차량과 부품 정보를 자동으로 인식해 필요한 작업을 수행한다. 기존 대량생산 방식의 완성차 공장과 이보 플랜트의 가장 큰 차별 포인트다.
▲ 180개 넘는 사양의 PV5도 척척…'다차종 생산' 특화
차체공장에 들어서면 탁 트인 생산라인이 눈에 띈다. 여타 공장 구조와는 달리 천장을 오가는 부품 운송설비를 지하와 2층으로 분산했다. 바닥에는 무인운반차(AGV)가 부품을 싣고 분주히 생산라인을 오간다. 공장 곳곳에서는 로봇을 비롯한 자동화 설비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이 공장의 핵심은 '4-벅(Buck) 순차조립' 공법이다. 기존에는 차체의 주요 부품을 하나의 공정에서 조립했다면 이곳은 인너벅·레일벅·아우터벅·루프벅 등 4개 공정으로 나눠 순차 조립한다. 차체의 뼈대와 외관을 단계적으로 구성해 크기와 구조가 다른 여러 종류의 PV5를 같은 라인에서 생산할 수 있다. 용접 조건도 공정별로 최적화할 수 있어 차체 강성 확보에 유리하다.


공정을 따라가다 보면 두 대의 로봇이 차체 앞뒤를 잡고 동시에 움직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PV5는 사양에 따라 길이와 무게중심이 달라 하나의 설비로 옮기기 쉽지 않다. 기아는 두 로봇의 움직임을 동기화하고 차체 사양에 맞춰 위치를 자동으로 조정해 이를 해결했다. 각 로봇은 최대 600㎏을 운반할 수 있다.
용접 역시 대부분 로봇의 몫이다. 차체공장의 용접 자동화율은 사실상 100%다. 일반적인 점용접 외에도 레이저·가스용접을 활용한다. 기존 용접건이 진입하기 어려운 폐구간에는 이른바 '레이저 심 스테퍼(LSS)' 공법이 사용된다. 네 대의 로봇이 차체 한쪽 면에 레이저를 조사해 차체를 접합한다.
▲ 사람이 보던 단차까지 '로봇'이…품질 검증까지 '데이터화'
자동화의 목적은 생산량을 늘리는 데만 있지 않다. 이보 플랜트가 강조하는 또 다른 가치는 균일한 품질 확보와 데이터 축적이다. 차체 조립 과정에서는 BMS(Body Measurement System)가 부품 장착에 필요한 홀의 위치를 측정해 데이터를 다음 공정으로 넘긴다. 이후 도어와 테일게이트 등 무빙 부품을 장착할 때 비전 카메라가 이를 다시 확인하고 로봇이 조립 위치를 스스로 보정한다. 작업자의 감각에 의존하던 조립 품질을 수치로 관리하는 셈이다.
조립공장에 들어서면 자동화 영역은 더욱 넓어진다. PV5의 검은색 후드는 세 대의 로봇이 위치를 맞춰 장착한다. 로봇은 대시보드를 구성하는 65㎏짜리 크래시패드도 3D 비전 카메라로 위치를 측정한 뒤 볼트 체결까지 담당한다. 헤드라이닝 자동 장착도 현대차·기아 양산공장 가운데 처음 적용된 기술이다.

품질 검증도 한층 정교해졌다. 외관 검사 설비는 차체 좌우 각각 21개 지점의 간격과 단차를 측정한다. 3D 비전 카메라의 반복 정밀도는 ±0.2㎜ 수준이다. 이어 18개의 카메라가 사이드미러와 도어 가니시, 펜더, 도어 핸들 등 24개 부품의 오장착·누락 여부를 확인한다. 헤드램프의 광도와 광축도 로봇이 자동으로 조정한다.
다만 기아의 지향점은 단순히 '무인공장'이 아니다. 조립공장은 형태와 재질이 서로 다른 약 600개의 부품을 다루는 만큼 여전히 사람의 손이 필요한 공정이 존재한다. 기아는 작업자와 자동화 설비가 공존하되 위험하거나 무거운 작업부터 자동화하는 방향으로 생산체계를 고도화하고 있다. 현재 이보플랜트 이스트조립공장의 자동화율은 20% 후반대로 기존 화성공장보다 약 9% 높다. 기아 측은 이를 통해 품질과 운영 효율이 약 10% 개선됐다고 설명했다.
▲ 5인승·카고 컴팩트 첫 공개…확장된 'PV5' 활용법
이날 현장에서 기아는 '패신저 5인승(1-2-2 레이아웃)'과 '카고 컴팩트'를 처음 선보였다. 패신저 5인승은 운전석과 승객석을 완전히 분리했다. 조수석을 떼고 2·3열에 각각 시트 2개를 배치하는 등 이동 서비스에 초점을 맞췄다. 조수석 자리에는 별도의 러기지 공간과 2단 구조 글로브박스를 마련해 공간 활용성을 높였다.


카고 컴팩트는 도심 물류에 특화했다. 차체 길이는 4495㎜로 카고 롱보다 200㎜ 짧지만 무려 4030ℓ의 적재공간을 확보했다. 차체는 줄였지만 넉넉한 적재공간을 갖춰 복잡한 도심에서의 배송 활용도를 높였다. 이날 함께 전시된 패신저 7인승(2-2-3 레이아웃)은 드넓은 3열 공간을, 프라임은 2열 독립시트와 원터치 릴렉션 모드 등 승객 편의성을 강조했다.
화물 운송에는 상용 모델인 오픈베드가 제격이다. 트럭처럼 뒤쪽에 넓은 개방형 적재함을 갖춰 부피가 큰 화물도 손쉽게 실을 수 있다. 같은 PV5를 기반으로 도심 배송부터 승객 수송, 고급 이동 서비스, 화물 운송까지 용도를 세분화한 셈이다. 기아가 이보 플랜트의 다차종 유연생산과 컨버전 체계를 함께 구축한 것도 다양해지는 PBV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 고객 맞춤형 차량으로…PBV 생산 허브 완성
이보 플랜트의 역할은 완성차 생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곳에서 만든 베이스카(기본차)는 인근 'PBV 컨버전 센터'에서 고객의 목적에 맞는 차량으로 거듭난다. 기아는 기존 특장차 방식과 달리 차량 개발 초기부터 컨버전 모델을 함께 설계한다. 홀과 브래킷, 제어기, 와이어링 등을 기본차에 미리 반영하고 불필요한 시트나 트림은 아예 넣지 않는다. 완성차를 다시 뜯어내는 과정을 줄여 생산 효율과 품질을 높이는 방식이다.
컨버전 센터는 연간 4만대의 생산능력을 갖췄다. 내부에는 98개의 작업셀과 14개의 검사셀이 마련돼 있다. 이보 플랜트에서 들어온 기본차는 컨버전 조립과 품질검사, 주행시험을 거쳐 고객에게 전달된다. 기아는 향후 PV5 크루밴과 내장·냉동탑차, 라이트 캠퍼 등으로 컨버전 모델 라인업을 넓힐 예정이다.

PBV 생산 허브도 확장을 앞두고 있다. 현재 PV5를 담당하는 이보 플랜트 이스트에 이어 약 13만㎡ 규모의 West가 내년 6월 준공을 목표로 건설 중이다. 이곳에서는 대형급 PBV인 '더 기아 PV7'을 생산한다. 아울러 이스트에서 검증한 기술을 바탕으로 무인지게차와 자율이동로봇(AMR), 인공지능(AI) 기반 검사 등 자동화 수준을 한층 끌어올릴 계획이다.
소득영 기아 오토랜드 화성 공장장 전무는 "오토랜드 화성은 차량을 만드는 공장을 넘어 고객과 파트너의 다양한 요구를 모빌리티로 실현하는 PBV 생산 허브"라며 "스마트 제조기술과 컨버전 생태계를 지속 고도화해 고객 선택지를 넓혀 나가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