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한스경제 최형철 산업국장겸 대기자 |우리나라 수출이 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지난 5일 오후 1시 기준 올해 누적 수출액은 7094억 달러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연간 수출액 7093억 달러를 넘어선 규모다. 이 추세라면 올해안에 수출 1조달러 고지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연간 1조달러 수출 금자탑은 미국과 중국, 독일만 쌓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끈 반도체는 이번 호황의 명실상부한 주역이다. 1~8월 반도체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170%에 가까운 폭증세를 보이며 전체 수출의 40%를 넘게 차지했다. 컴퓨터 주변기기, 석유제품, 선박 등 관련 산업까지 온기가 번지면서 수출 지표만 놓고 보면 한국 경제는 유례없는 호황기를 맞고 있다.

그런데 같은 시기 증시는 정반대의 그림을 그렸다. 6월 중, 9400대에 근접해 '만스피' 기대감에 부풀었던 코스피는 이후 6000대까지 밀려나며 30%에 가까운 조정을 받았다. 경상수지와 수출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축제의 정점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은 거꾸로 주식을 팔고 떠났다. 지난 8개월 가운데 외국인이 월간 순매수를 기록한 것은 단 2개월에 그쳤다. 이들의 누적 순매도는 170조원에 육박해 역대 최대 수준이다.
실물경제 성적표와 자본시장 평가가 이토록 엇갈리는 이유는 뭘까.
흔히 원·달러 환율 변동성과 한미 금리 역전이 이 괴리의 '원흉'으로 지목된다. 원화 약세에 따른 환차손을 피하려는 외국인들의 방어적 행동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원화는 달러대비 고점 1550원대에서 최근 1350원대로, 두 달 만에 200원 이상 낙폭을 키웠다. 그런데도 외국인은 7월 9조8143억원을 순매도한 데 이어 8월에는 12조1689억원어치를 팔아치웠다. 외국인 탈출이 환율 변동성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 자본시장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신호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대표적으로 후진적인 기업 지배구조와 취약한 주주환원책을 꼽을 수 있다. 기업들이 막대한 이익을 곳간에 쌓아두면서도 배당이나 자사주 소각 같은 실질적 환원에는 인색한 경우가 많다. 알짜 사업부의 물적 분할이나 대주주 일가에 유리한 불투명한 합병 등이 반복되는 시장에서 주식 장기 보유는 미덕이 아니라 오히려 손실을 자초하는 위험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재명 정부는 세 차례에 걸쳐 상법을 개정하며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 전체로 확대하는 등 자본시장의 '헌법'을 새로 썼다. 그럼에도 상장사 70% 가까이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에도 못 미치는 저평가 상태에 머물러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개별 기업들이 법 개정의 취지를 회피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다는 점이다. 일부 기업은 주총에서 이사 수를 줄여 집중투표제 도입 효과를 무력화하기도 했다.

이 문제를 정면 돌파하지 않는 한한국 증시 후진성 극복은 불가능하다. 몇 가지 방향에서 해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 전체로 확대한 상법 개정의 취지를 실질적으로 뿌리내려야 한다. 법 개정 이후 행동주의 펀드와 기업 간 표 대결 대신 협상을 통한 지배구조 개선 합의가 나타나고임원 보수와 성과지표를 연동해 공시하는 사례가 늘어난 것은 고무적인 변화다. 다만 이사 수 축소를 통한 집중투표제 무력화나 정관 변경을 통한 규범 회피처럼 꼼수 대응이 반복되지 않도록 보완 입법을 신속히 이어가야 한다.
둘째, 공시 제도를 사후 결과 통보 수준에서 사전 의사결정 근거 공개 수준으로 고도화해야 한다. 투자를 결정할 때 자본조달 방식, 예상수익률, 그리고 무엇보다 기업의 자기자본비용을 함께 공시하도록 의무화하면이사회는 자본비용보다 낮은 수익을 내는 사업에 함부로 자금을 투입하기 어려워진다.
셋째, 디스커버리(증거개시) 제도를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 공시가 기업의 자발적 정보 공개라면디스커버리는 은폐된 자료에 주주가 대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장치다. 두 제도가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형사 고발 남발에 의존하지 않고도 시장 스스로 규율을 만들고 해법을 찾을 수 있다.
넷째, 주주총회를 실질적인 견제의 장으로 되살려야 한다. 주주가 이사회에 특정 정책의 검토나 설명을 요구할 수 있는 '권고적 주주제안' 제도 활성화가 좋은 예다. 주주가 이사회의 경영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다.
다섯째, 해외법인에도 이사의 주주충실의무가 적용돼야 한다. 국내 대기업의 해외 손자회사 지분 매각처럼 국경을 넘는 지배구조 이슈에서 정작 국내 주주가 정보에서 소외되는 사례가 실제로 발생하고 있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웩더독(Wag the Dog)'현상이다. 글로벌 사업 구조가 복잡해질수록 이사의 책임 범위를 해외법인까지 규정해야 하는 이유다.
가을 국회에서 '디테일넘치는' 상법개정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그래야 증시가 살고, 기업이 살고, 투자자들도 믿고 시장에 참여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