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국제뉴스) 이정주 기자 =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위치에 섯던이들은 공통적으로 뜻밖의 감정을 고백하곤 했다.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정복한 에드먼드 힐러리는 정상에 선 뒤 "우리가 정복한 것은 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라고 말하며, 그 뒤에 찾아온 형용할 수 없는 허탈함을 언급했다.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 역시 8관왕이라는 전무후무한 대업을 이룬 뒤 "아침에 일어날 이유를 잃었다"며 지독한 공허감에 시달렸음을 고백했다.
지금 여자 프로당구(LPBA)의 절대 권력, '당구 여제' 김가영(하나카드)이 마주한 상황이 이와 닮아 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정점에 도달한 자가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심리적 정체기, 즉 '정상의 역설(Summit Paradox)'이다.
# 38연승과 17회 우승, 독보적 성취가 남긴 '동기부여의 공백'

김가영은 지난 2024-25시즌 3차 투어부터 올 시즌 개막전까지 8개 대회 연속 우승이라는, 당구 종목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신화를 썼다. 255일간 이어진 38연승과 통산 17회 우승. 2위 스롱 피아비(9회 우승)와의 격차를 두 배 가까이 벌리며 사실상 LPBA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다.
마치 NBA의 마이클 조던이 첫 번째 3연패 달성 후 목표 상실감으로 코트를 떠났던 것처럼, 혹은 체조의 영웅 시몬 바일스가 극도의 정신적 압박 속에 심리적 공백을 겪었던 것처럼 김가영에게도 '정상 이후'에 대한 고뇌가 찾아온 모양새다. 올 시즌 5차 대회 우승 이후 6차부터 9차 대회까지 보여준 16강, 32강, 그리고 충격적인 첫판 탈락 등의 성적표는 그가 기술적으로 퇴보해서라기보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정점에서의 '서밋 블루스(Summit blues)'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 무뎌진 큐 끝에 서린 고뇌… 여제도 사람이었다
현재 제주에서 열리고 있는 '하나카드 하나캐피탈 제주특별자치도 LPBA 월드 챔피언십 2026' 조별리그에서도 위기 징후는 포착된다. 여전히 1점대 초반의 높은 에버리지를 기록하며 클래스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고비 때마다 상대를 압도하던 예리한 '칼끝'이 어딘가 무뎌져 있다. 한지은에게 완패하고 김진아를 상대로도 어렵게 승리하며 16강에 턱걸이한 모습은, 승리에 대한 갈망보다 기록의 무게에 짓눌린 거장의 고독한 뒷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래미를 휩쓴 세계적 가수 아델이 엄청난 성공 뒤에 공허함이 찾아왔다고 고백했듯, 김가영 역시 자신이 쌓아 올린 17층의 우승 탑 위에서 방향을잃은 듯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팬들이 느끼는 감정은 비판이 아닌 걱정이다. "김가영마저 흔들리는가"라는 의문보다는 "그가 짊어진 왕관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까"에 대한 걱정과 공감이 앞서기 때문이다.

# '천적' 정수빈과의 16강전, 다시 일어날 이유를 찾아서
이제 김가영은 이번 왕중왕전16강에서 자신에게 세 번의 패배를 안긴 '천적' 정수빈(NH농협카드)을 만난다. 역설적이게도 이 만남은 김가영에게 독이 아닌 약이 될 가능성이 크다. 펠프스가 새로운 목표를 찾으며 다시 물살을 가르고, 조던이 다시 농구화를 신었듯, '천적'의 등장은 여제에게 다시 큐를 꽉 쥐어야 할 '명확한 이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11일 밤 9시 30분 펼쳐지는 이번 승부는 단순히 8강 진출자를 가리는 게임이 아니다. 김가영이 스스로 만든 거대한 기록의 성벽을 허물고, 다시 한번 '당구 자체'를 즐기던 야수성을 회복할 수 있을지를 판가름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제주의 푸른 바다 위에서 여제가 '정상의 역설'을 깨뜨리고 다시 비상할 수 있을지, 그를 사랑하는 수 많은 당구 팬들의 따스한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