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강상헌 기자]생계를 위해 동대문 시장을 달리던 무명의 사이클 선수가 한국 경륜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주인공은 정종진(20기·SS·김포)이다. 그는 지난 3일 광명스피돔에서 열린 18회차 2일차 15경주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경륜 역사상 가장 빠른 기간에 통산 500승을 달성했다.

종전 한국 경륜에서 가장 먼저 500승을 달성한 선수는 홍석한(8기·A2·인천)이었다. 그는 지난 2016년 9월 2일 793경주째에 출전해 500승(평균 승률 63.1%)을 달성했다. 정종진은 그보다 180경주나 빨리 500승 고지에 올랐다. 613경주 만에 500승(평균 승률 81.6%)을 일궈냈다.

정종진이 현재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험난했다. 중학생 시절 선생님의 권유로 사이클과 인연을 맺은 그는 서울체고를 나와 실업팀 부산경륜공단과 상무를 거쳤지만,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늘 2위, 3위에 머물렀고, 태극마크도 달지 못했다. 프로 경륜 선수가 되기 위해 18기 경륜 선수 후보생 시험에 도전했지만 낙방하기도 했다.

정종진은 좌절 대신 인내심을 키웠다. 경륜 선수 후보생 시험 재도전을 결심한 그는 이듬해 19기 후보생 시험에 바로 응시하지는 않았다. 완벽한 합격을 위해 운동할 시간이 필요했고, 생활비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2년간 동대문 시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운동을 병행했다. 이후 그는 20기로 경륜훈련원에 입학했고, 수석으로 졸업하며 2013년 늦가을 경륜 선수로 본격 입문했다.

2013년 11월 10일 정종진은 입문 이후 3번째 경주에서 첫 승을 따냈다. 이듬해에는 특선급에 진출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수석으로 졸업했음에도 자신보다 졸업 순위가 낮은 선수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정종진은 특유의 성실함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3년 차인 2015년부터 그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정종진은 2015년 3월부터 입상 횟수가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다. 6월 28일 이사장배 대상 경륜에서는 생애 첫 대상경륜 우승까지 차지했다. 당시 그랑프리 우승 경험이 있었던 이명현(16기·S3·북광주), 박병하(13기·A1·창원 상남), 이현구(16기·S1·김해 장유)를 비롯해 절정의 기량이었던 박용범(18기·S1·김해 B) 등 쟁쟁한 선배 선수들을 상대로 완벽한 젖히기를 선보이며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날을 계기로 정종진이라는 이름이 한국 경륜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정종진은 이날의 경주를 500승 중 가장 값진 승리로 꼽기도 했다.

이후 강자 반열에 오른 정종진은 거침없이 무섭게 내달렸다. 2016년부터 2019년까지 그랑프리 4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동시에 4년 연속 다승 1위에 올랐다. 상금 1위도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이후 정종진은 2022년 다시 그랑프리 정상에 서며 그랑프리 5승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만들어 냈다. 이듬해인 2023년에도 다승 1위를 마크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마침내 역대 최단기간 500승 달성까지 이뤄냈다.

경륜경정총괄본부는 정종진의 500승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경주 직후 광명스피돔에서 기념 행진을 열었다. 이후 정종진 선수의 가족, 동료 선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기념패와 꽃다발을 전달했다. 정종진은 "500승을 달성하게 돼 기쁘다. 하루하루 열심히 훈련하고, 시합에 출전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10년 이상을 한결같이 응원을 보내주시는 모든 분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정종진은 1987년생이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그의 기량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2023년 60승, 지난해 57승을 거뒀다.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2016년 59승, 2017년 63승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기록이다. 올해도 승률 89%, 연대율과 삼연대율은 100%를 기록하고 있는 만큼 특급 활약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예상지 최강경륜의 설경석 편집장은 "아마추어 시절 화려했던 선수들이 정작 프로 무대에서는 맥을 못 추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마추어 시절 무명의 사이클 선수였던 정종진은 프로 무대에 진출해 10년 이상 최고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특유의 성실함과 인내심을 갖춘 정종진이 향후 어떤 새역사를 써 나갈지 지켜보는 것도 경륜을 즐기는 또 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