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뉴스] 정영훈 칼럼니스트 = 그리스의 섬들을 떠나 피레우스 항에 도착하니 여행의 색깔이 달라진다. 오늘의 목적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동북부, 고대 도시국가 코린트. 아테네에서 차로 두 시간 남짓, 우리는 고대와 신화가 겹겹이 쌓인 그 땅으로 향했다.

코린트에 가까워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시지프스 산이었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산허리를 이글이글 달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신을 속이고 자신의 꾀를 믿다가 영원히 바위를 밀어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가 떠올랐다. 그는 이 산 정상까지 바위를 올려야 형벌이 끝나지만, 바위는 매번 굴러떨어진다. 그 영겁의 반복 속, 오늘도 묵묵히 바위를 밀고 있을 그의 모습이 햇살 속에 겹쳐졌다.

코린트는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도시국가였다. 아테네, 스파르타와 함께 손꼽히는 강국이었고, 특히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 그 흔적은 오늘날에도 선명하다.

우리는 먼저 코린트 고고학 박물관을 찾았다.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사자가죽을 뒤집어쓴 헤라클레스 부조였다. 그는 코린트 출신이라 한다. 12과업 중 첫 번째 과업이었던 네메아의 사자를 무찌르고 얻은 사자가죽을 걸친 헤라클레스는 불사의 힘을 지닌 존재로 남아 있다. 그의 근육질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과 의지가 유물 너머로 느껴지는 듯했다.

이곳에서 또 인상 깊었던 것은 코린트 도기였다. 냉장고도 없던 시절, 이중 코팅된 코린트 도기는 음식물 보존에 탁월해 지중해 전역으로 퍼졌다고 한다. 단순한 생활도구조차 아름다움과 실용성이 어우러진 코린트인의 지혜가 담겨 있다.

그리스 조각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쿠로이(Kouroi) 동상도 만났다. 젊음과 힘, 미를 상징하는 이상적인 인체 비율을 지닌 이 동상들은 BC 7세기부터 5세기 사이 유행했던 형식이라 한다. 그 완벽한 균형과 아름다움에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본 로마 황제 네로의 두상은 또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그는 코린트에 운하를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공사가 시작됐지만, 네로의 실각과 함께 공사는 멈췄고, 그 운하는 1893년에야 완공되었다. 지금의 코린트 운하는 폭 24m, 깊이 8m, 길이 6.3km로, 이오니아 해와 에게 해를 직접 잇는 인공 수로다. 절벽 사이로 펼쳐지는 옥빛 바다와, 그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하얀 배 한 척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코린트는 사도 바오로의 전도지로도 유명하다. 신약성경의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가 쓰인 곳이기도 하다. 한때 로마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BC 146년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줄리어스 시저의 명으로 다시 세워졌고, 바오로는 이 재건된 도시에서 복음을 전했다.

현재 코린트 유적지에는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아폴론 신전, 그리고 바오로가 재판을 받았다는 비마(Bema)가 남아 있다. 돌기둥 몇 개, 초목이 엉킨 폐허 위로 지중해의 햇살이 쏟아진다. 그 웅장했던 문명이 남긴 것은 이제 조용한 돌과 잡풀뿐이다.

문득 떠오른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곳 없다."

시간의 흐름 속에 잠시 머물다 가는 인간. 신화 속 신들도 사라지고, 도시국가의 번영도 돌무더기로 남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고요히 마음을 채운다.

돌아가는 차 안, 고등학교 은사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Today is the first day and last day of my life."

코린트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영원을 품은 하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