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샘일보 = 칼럼니스트 정재호)

다음 달부터는 '소득?자산 심사 패스'라는 파격 조건의 비아파트 전세임대가 시장에 나온다. 무주택자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고, 집만 찾아오면 LH가 대신 전세 계약을 체결해 주는 구조다. 올해 물량은 5000채, 예산은 5200억 원. 숫자만 보면 소규모 파일럿이지만, 전세난에 지친 세입자에게는 숨통을 틔울 신호탄일 수 있다.

지원 한도는 수도권 전세보증금 3억 원 가운데 최대 2억 원, 광역시는 1억2000만 원. 가령 2억짜리 전세를 구했다면 본인 부담금은 4000만 원 수준이고, 월세로 환산한 임대료는 13만~26만 원대다. 사실상 연 1~2%대 저리 대출로 안정성을 확보하는 셈이니, 전세 사기 공포에 시달린 신혼·청년층에겐 매력적인 옵션일 수밖에 없다.

정부가 우선순위를 신생아 출산 가구와 다자녀 가구에 둔 것도 눈길을 끈다. "출산 장려"와 "주거 지원"을 한 번에 잡겠다는 계산이지만, 공급 물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 사회적 체감효과는 제한적일 가능성이 크다. 올해 같은 규모면 서울 한 지역구에 배정될 물량이 손가락으로 셀 정도라는 지적도 나온다.

결국 관건은 '속도와 스케일'이다. 정부는 내년에도 동일한 형태로 5000채를 추가 공급할 계획인데, 수요 폭증에 대비하려면 물량·대상 지역·지원 한도를 한 발 앞서 확장할 필요가 있다. 보증금 보험과 집 상태 점검은 LH가 책임지지만, 입주자가 직접 물건을 찾아야 하는 만큼 정보 비대칭을 줄일 매칭 플랫폼 개선도 시급하다. 또 한 가지, 임대료 책정 방식이 평형·지역별로 지나치게 획일적이면 '가격 역전(逆轉)'이 발생할 수도 있다. 현재 전세가가 급락한 지역에서는 일반 전세가 더 싸게 느껴지는 역전 현상이 이미 일부 나타났다. 탄력적 임대료 조정과 주거 품질 관리가 병행돼야 제도가 '빈집 청소부'로 전락하지 않는다.

세입자의 최대 리스크인 전세보증금 미반환 문제를 공공이 대신 떠안는다는 메시지는 분명 긍정적이다. 다만 정책이 '희망고문'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물량과 품질, 그리고 정보 접근성 세 축을 동시에 잡아야 한다. 작은 실험이 큰 파급력을 갖추려면, 이제 정부가 숫자보다 '체감 안전망'을 설계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