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우리뉴스) 이가은 기자 =SK텔레콤이 '유심 해킹' 사고와 관련해 "피해 발생 시 책임지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하지만 문제는 사전 방지보다 사후 보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특히 연휴 기간 급증한 해외 출국자들이 공항 로밍센터에 몰리며, 유심 교체를 제때 하지 못한 이들의 불안감이 증폭됐다.

"정보가 털리면 책임지겠다"는 SK텔레콤의 설명은 다소 수동적인 대응에 가깝다. 실제로 피해 발생 여부를 입증하는 것은 고객의 몫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불안감은 SNS를 통해 확산됐고, 이용자들 사이에서는 "통신사가 아니라 보안업체를 고용한 느낌"이라는 자조적인 반응도 나왔다.

"해외서 해킹되면 책임지겠다"?…보호의 역설

SK텔레콤은 기존 유심보호서비스가 "정상 단말기와 복제 단말기를 구분하는 기술"로 고객 정보를 지켜주고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해당 서비스는 해외 로밍과 동시에 이용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었고, 이로 인해 해외 체류 중인 고객들은 사실상 보호 장치 없이 방치됐다.

이러한 제약은 정보보호의 사각지대를 만들었다. 실제로 일부 해외 이용자들은 현지에서 금융 인증이 차단되거나, 2차 인증 절차에서 실패하면서 불편을 호소했다. 이번 사고가 단순한 기술적 해킹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미비에서 비롯된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SK텔레콤은 이를 개선한 '유심보호서비스 2.0'을 오는 14일부터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새 서비스는 로밍과 보호 기능의 병행을 가능하게 해 고객 혼선을 줄일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미 유출이 발생한 상황에서 이 같은 조치가 '너무 늦은 대응'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또한 유심 교체를 원하는 고객들이 공항 로밍센터에 몰리면서, 긴 대기 줄과 혼잡이 발생했다. SK텔레콤은 700여 명의 인력을 긴급 투입했지만, 빠른 서비스를 원하는 고객들에게는 패스트트랙 옵션이 없어 여전히 불만이 남는다. "해외 출국 직전까지 유심을 못 바꾼 고객의 해킹 피해는 책임지겠다"는 입장은 일종의 면피성 메시지로 해석되기도 한다.

법정으로 향하는 분노…줄소송 시작

문제는 단순히 고객 불편에 그치지 않았다. 법무법인 '거북이'는 2일 SK텔레콤을 상대로 총 53명의 고객을 대리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1인당 100만 원, 총 5300만 원을 청구했으며, "SKT 전체 가입자 수(약 2500만 명)로 환산할 경우 피해 규모는 25조 원에 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채널을 통한 집단소송 움직임이 확산 중이다. 서민민생대책위원회는 가입자 7명을 대리해 1인당 3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이미 제기했고, 로피드법률사무소는 지급명령을 신청하며 소송 절차에 들어갔다.

특히 해외 체류 이용자들의 불만이 거세다. 로밍 중에는 유심보호서비스 이용이 불가능해졌던 기존 정책 탓에, 이들은 실질적인 보안 사각지대에 방치됐다. 유심 교체로 인한 시간·경제적 비용은 물론, 통신사 변경 시 위약금까지 부담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소·고발도 이어지고 있다. 법무법인 대륜은 유영상 SKT 대표이사 및 보안 책임자를 업무상 배임, 위계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정보보호 예산 집행률이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는 지적은 SKT의 내부 통제 시스템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정부 역시 막대한 과징금을 검토 중으로, 향후 규제 리스크도 가시화되고 있다.

SKT, 신뢰 회복의 조건

SK텔레콤은 현재 비상경영체제를 최고 수위로 끌어올린 상태다. 모든 임원은 주말을 포함해 매일 오전 7시에 출근해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있다. 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조치지만, 이미 흔들린 고객 신뢰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해킹 사건이 아닌, 시스템 전반의 구조적 결함과 부실 대응이 낳은 복합적 위기다. 보안 인프라에 대한 선제적 투자 부족, 서비스 설계의 허점, 이용자 중심이 아닌 내부 편의 중심의 운영 철학이 총체적으로 드러났다. SK텔레콤이 다시 고객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기술적 보완을 넘어 고객 관점에서의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한다. 그러나 그 기회는 기업이 스스로의 책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고객과의 신뢰를 다시 설계할 때만 의미를 가진다. '통신 1위 기업'이라는 타이틀이 이제는 방패가 아닌, 더 무거운 책임의 증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