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김종효 기자] 지난해 국내 딥테크 분야 벤처투자가 최근 5년간 최대 규모를 기록했지만 유니콘 기업 배출은 AI 반도체 스타트업 리벨리온 단 한 곳에 그쳤다. 외형적 성장과 내실 사이의 괴리가 두드러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16일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벤처투자 중 딥테크 10대 분야 투자금액은 총 3조600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 대비 34% 증가한 수치이며 최근 5년간 최대치다.

분야별로는 바이오헬스케어(33%)와 인공지능(26.7%)이 전체 투자 60% 가까이를 차지했으며 특히 AI 하드웨어 부문 투자 증가율이 290.9%로 급격한 상승세를 기록했다.

하지만 투자 규모와 달리 성과 지표는 초라하다. 2024년 상반기 기준 국내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비상장사) 22개 중 딥테크 분야는 리벨리온이 유일하다. 전년 대비 3개사에서 1개사로 축소된 것이다. 리벨리온 외 에이블리코퍼레이션이 유니콘으로 거론되지만 이 회사는 전자상거래 플랫폼 운영사로 딥테크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업계 관계자들은 "국내 딥테크 스타트업이 기업공개(IPO)나 인수합병(M&A)을 통한 투자 회수까지 평균 7~10년이 소요되는 반면 국내 벤처캐피털(VC) 펀드 수명은 5~7년 수준"이라며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다. 실제 2024년 기준 국내 VC의 73%가 7년 미만 펀드이며 10년 이상 장기펀드 비중은 12%에 불과하다.

이런 환경에서 리벨리온의 성장은 주목할 만하다. 2023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부터 3000억원 규모의 시리즈C 투자를 유치하며 기업가치 1조3000억원을 기록하며 국내 첫 AI 반도체 유니콘으로 등극했다. 리벨리온은 지난해 국내 상장을 위한 주관사를 선정한 바 있고 미국 진출을 위해 미국 법인 설립도 고려하고 있다.삼성 파운드리 4nm 공정 기반 차세대 AI 반도체 양산을 준비하고 있다.

리벨리온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딥테크 장기 성장을 가로막는 장벽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R&D에 집약된 구조를 꼽을 수 있다. 딥테크는 소프트웨어 스타트업에 비해 초기 개발비용과 기간이 월등히 높다.

리벨리온의 경우 초기 칩 설계 검증을 위해 약 800억원을 투입해야 했으며 삼성전자 파운드리 공정 적용까지 추가 2년이 소요됐다. 이는 일반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초기 개발비용인 평균 50억원 대비 16배 수준이다.

글로벌 경쟁력 부족도 넘어야 할 과제다. 2024년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에서 엔비디아 점유율은 82%인 반면 리벨리온의 점유율은 0.3% 미만으로 추정된다. 국내 시장조차 삼성전자(65%)와 SK하이닉스(23%)가 88%를 장악한 상황이다.

정책 지원도 편중돼 있다. 현재 정부의 딥테크 지원사업 78개 중 61개(78%)가 초기 창업단계에 집중되어 있으며 성장단계 지원 프로그램은 17개에 그친다. 투자 유치 후 R&D 확장 단계에서의 지원이 취약한 구조다.

이에 VC 업계는 해외 사례를 벤치마킹할 것을 권고한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20년형 펀드'가 45%를 차지하는 반면 국내 장기펀드 비율은 12% 수준이다. 이스라엘의 경우 정부가 초기 리스크를 85%까지 보장하는 '요즈마(Yozma) 프로그램'으로 10년 만에 유니콘 21개를 배출한 사례도 주목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민간펀드의 장기화 유도를 위한 세제 혜택 확대와 동시에 대규모 R&D 인프라를 국가 차원에서 공유하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네덜란드의 ASML은 반도체 광학장비 개발 시 정부 주도로 11개 대학·연구소의 인프라를 개방한 사례가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업계는 올해를 딥테크 생태계의 전환점으로 본다. 리벨리온의 사업성공 여부가 향후 5년간 국내 딥테크 투자 환경을 좌우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국내서도 장기·대형 투자 움직임이 시작됐지만 민간 펀드의 장기화 유도, 세제 혜택 확대, 대규모 R&D 인프라 공유 등 체계적 생태계 구축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VC업계는 "딥테크는 단기 수익이 아닌 장기적 안목과 대규모 자본, 정부-민간의 유기적 협력이 필수"라고 강조한다. 투자 회수 구조 개편, 성장 단계 지원 확대, 글로벌 진출 지원, 그리고 대기업-스타트업 간 상생 모델 구축이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업계 관계자는 "성장과 위기가 공존하는 시점에서 한국 딥테크 생태계의 내실 있는 성장을 위한 인프라 재편이 시급하다"며 "투자 규모 확대는 물론 기술 상용화부터 글로벌 시장 진출까지 전 주기를 아우르는 생태계 구축이 숙제로 남았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