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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철 박사의 역사 속의 대한민국 재발견-13

국제뉴스 | 2020.04.07 | 신고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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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연철 호담정책연구소 소장(국제뉴스DB)

있으렴 부디 갈다 아니 가든 못할소냐
무단히도 싫더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려도 하 애고야 가는 뜻을 일러라


이 시조는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이 홍문관(弘文館) 교리(정5품 벼슬로 오늘날 정부 부처의 과장급 직위)의 자리에 있던 유호인(好仁, 1445~1494년)이 노모의 봉양을 위해 관직에서 물러나려 하자 그를 만류하며 지은 시조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신하가 임금을 위해 지은 글은 많지만 임금이 신하를 위해 지은 시는 이 작품이 유일하다. 조선시대 조정에서 관직을 받은 벼슬아치들이 최소 1천 여명 이상임을 감안할 때, 성종 임금이 유호인이라는 신하에게 이런 글을 지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 하겠다.


그럼 성종과 유호인은 어떤 관계였기에 유호인이 관직을 내려 놓고 떠나려 할 때 성종 임금이 이런 글을 내렸을까.


먼저 성종은 그 묘호(황제나 왕이 죽은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붙이는 호를 말함)에서 보듯이 재위중 많은 업적을 이룸으로써 조선왕조를 안정적 기반위에 올려 놓은 임금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12세의 어린 나이로 갑작스럽게 즉위했지만, 25년간 재위하면서 내실있게 국정을 운영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앞선 문종이 붕어하고 단종이 즉위했을 때 세조에 의한 정변을 경험한 조선 조정은 예종의 맏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이 3살 때 예종이 붕어하자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지체 없이 성종을 후계자로 선정하였다. 그렇게 즉위한 성종은 조선 건국 이후 추진하고 있던 여러 제도의 정비를 완결시킴으로써 왕조가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조선 전기에 이룩한 가장 큰 업적중 하나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바로 성종 16년(1485년)에 완성되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큰 법전’이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경국대전은 임금을 정점으로 조선의 지배세력이 국가 전반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제도를 완비했다는 의미를 담은 법전이다.


이러한 치적에도 불구하고 성종의 개인사는 후대 들어 엄청난 피바람을 잉태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성종은 한명회(韓明澮)의 딸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 윤기견(尹起)의 딸인 폐비 윤씨, 윤호(尹壕)의 딸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 등 세 명의 왕비와 숙의(淑儀) 하씨 등 10명의 후궁을 두었고, 이들과의 사이에 연산군과 중종이라는 대군(大君) 2명, 공주 2명, 왕자군(王子君) 2명, 옹주(翁主) 11명 등 모두 29명의 자녀를 얻었다.


특별히 두 번째 정비였던 윤씨는 성종 4년(1473년) 숙의로 책봉되었다가 이듬해 공혜왕후가 사망하자 왕비에 책봉되었었다. 그리고 석달 뒤 연산군이 태어났으나, 1년 후 그녀가 비상(砒霜, 독약의 일종)을 숨겨놓은 것이 발각되어 빈(嬪)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윤씨는 성종 10년(1479년) 서인(庶人)으로 폐출되었다가 3년 후인 성종 13년(1482년) 8월 사사(賜死)되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친모였던 윤씨의 비극을 즉위 1년 후 알게 되었고, 후에 폐비 윤씨 문제는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으로 이어져 피바람을 불러오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다음으로 유호인을 살펴본다.


기록에 의하면 유호인은 세조 8년(1462년) 생원(生員)이 되었고, 성종 5년(147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종 9년(1478년) 사가독서(賜暇讀書, 조선시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한 후 성종 11년(1480년)에 거창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정6품 관직인 공조좌랑과 검토관을 거쳐 성종 17년(1486년)에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은 1486년 완성된 인문지리서다.


이후 유호인은 홍문관 교리로 재직하다 성종 19년(1488년) 고향인 의성현령으로 나갔다가 2년 후인 1490년 ‘유호인시고(好仁詩藁)’를 편찬하여 성종으로부터 표리(表裏, 옷의 겉감과 안감)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합천군수로 재직 중이던 성종 25년(1494년) 병사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성종 임금이 특별히 유호인에게 위와 같은 시조를 내릴 만큼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성종 임금 시기에 많은 업적들이 있었고, 그 업적들을 수행한 훌륭한 관료들이 많았을 것이기에 유호인 만을 총애할 이유가 없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경남 함양읍 대덕리에 유호인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를 주목해 본다.


이야기에 의하면 유호인은 함양읍에 있는 도덕바위에서 낚시를 하다가 2자 가량되는 큰 잉어를 낚아 올렸다. 유호인은 이렇게 큰 잉어를 욕심내는 것은 사욕이라 생각하고 임금께 진상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갔다.


보름 만에 한양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저녁 때라 입궁할 수가 없어 주막에 여장(旅裝)을 풀고 한양 구경을 하였다.


한동안의 한양 구경을 한 후 통행금지를 알리는 소리가 들려 서둘러 주막집을 찾았으나 초행길인 한양에서 자신이 들렸던 주막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때 자신을 ‘북촌 사는 이 교리(敎理, 홍문관의 정5품 직위)’라고 하는 사람이 말을 걸었는데, 사실 그는 잠행을 나온 성종 임금이었다. 성종은 그에게 자신의 집에 가서 머물기를 청하였고 선생은 이에 응하였다.


집에 가서 술상을 받았는데 차려진 음식이 진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호인은 교리(校理)에 불과한 사람이 걸맞지 않은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진귀하게 차린 음식을 두고 성종을 호되게 꾸짖었다.


이런 유호인의 충성심 높은 행동에 성종은 감동하였고, 이후 유호인을  항상 가까이 하며 붕우(朋友)의 정의(情義)를 변치 않았다고 한다.


유호인이 생원이 되고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기까지 12년의 시간이 걸린 점을 감안한다면 이 기간 중 일어났던 일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성종 자신은 임금으로서 모든 대소 신료들의 품성까지 헤아릴 수 없었겠지만 커다란 잉어와 관련된 일화를 지닌 유호인을 각별하게 생각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더구나 부모 봉양을 위해 사직을 하고 낙향하려는 유호인을 붙잡으려 하는 성종의 인간적인 면모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잔잔한 감동을 준다.


비록 자신이 지닌 자리가 높지는 않더라도 어떠한 조직에서나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휘하의 직원에게 성종과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다면 그 조직은 언제든 빛나는 이야기를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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